위게트 드레퓌스 — 프랑스 하프시코드의 어머니
루세와 보몽 뒤에 있던 이름, 그리고 전쟁이 빚은 음악가
원저 Harpsichordist Huguette Dreyfus and the French Early Music Revival · Sally Gordon-Mark (2016)
출처 Semibrevity
옮김 최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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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에 보몽올리비에 보몽 (Olivier Baumont)파리 국립 고등음악원(CNSMDP) 하프시코드 교수. 뤼에유-말메종에서 드레퓌스에게 배운 뒤 그녀의 후임으로 교수직을 이어받았다. 자크 뒤플리의 클라브생 음악 전집(Plectra PL22601, 2024)을 녹음했다.이 연주하는 자크 뒤플리를 들으면서 나는 종종 그 건반 터치에 담긴 어떤 계보를 떠올린다. 프랑스 하프시코드 연주의 특유한 감각 — 과도하게 장식적이지 않으면서도 텍스처가 촘촘하고, 정확하면서도 숨이 있는 — 은 단지 악기에서 오는 게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연주자가 다음 세대에게 손에서 손으로 건네는 것이다.
보몽의 스승이 위게트 드레퓌스였다. 크리스토프 루세크리스토프 루세 (Christophe Rousset, 1961–)레 탈랑 리리크(Les Talens Lyriques)를 창단한 하프시코드 연주자이자 지휘자. 1983년 브뤼헤 하프시코드 콩쿠르에서 22세에 1위를 차지했다.의 스승도 드레퓌스였다. 바이올리니스트 헨릭 셰링헨릭 셰링 (Henryk Szeryng, 1918–1988)폴란드계 멕시코 바이올리니스트. 드레퓌스와 공연한 후, 다른 하프시코드 연주자와는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1981년 헨델 바이올린 소나타 6편과 코렐리 「라 폴리아」를 함께 녹음했다.은 그녀와 한 번 연주한 뒤 다른 하프시코드 연주자와는 무대에 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40년 이상 함께 연주한 바이올리니스트 에두아르트 멜쿠스에두아르트 멜쿠스 (Eduard Melkus, 1928–)오스트리아 바이올리니스트, 카펠라 아카데미카 빈 창단자. 드레퓌스와의 만남은 1964년 생막시맹 여름 아카데미에서였다. 이후 아르히프 프로덕션에 코렐리, 비버, 쿠프랭을 함께 녹음하며 45년간 파트너십을 이어갔다.는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녀는 프랑스 최고의 하프시코드 연주자였다.”
뮐루즈의 소녀, 전쟁의 음악가
Pauline Huguette Dreyfus는 1928년 11월 30일 알자스의 뮐루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페르낭은 뮐루즈와 비시에 깃털 공장을 둔 유대인 실업가였고, 12년 연상의 오빠 피에르는 훗날 의사가 됐다.
네 살에 피아노를 시작했다. 열 살이 되던 1939년 7월 2일, 그녀는 처음으로 공개 무대에 올라 베토벤 「비창」 소나타를 연주했다. 두 달 뒤 전쟁이 시작됐다.
가족은 알자스를 떠나 비시로 피신했다. 유대인 어린이는 음악원에 정식으로 입학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위게트는 클레르몽-페랑 음악원에 가명으로 등록해 피아노를 공부했다.비시 정권과 유대인1940년 독일 점령 이후 수립된 친독 협력 정부. 1942년부터 프랑스 내 유대인을 나치에 적극 인도했다. 드레퓌스는 가명으로 음악을 공부해야 했고, 가족은 결국 스위스로 탈출했다. 1942년 12월 10일, 아버지·오빠와 함께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 로잔으로 탈출했고, 로잔 음악원에 “비르투오조” 과정으로 편입했다.
1944년, 열다섯 살의 위게트는 혼자 국경을 다시 넘었다. 1945년 봄과 여름에는 클레르몽-페랑으로 돌아가 최종 시험을 보고 두 번 모두 수석으로 통과했다.
그해 열여섯 살의 위게트는 파리의 오빠 곁으로 왔다. 이듬해부터 에콜 노르말 드 뮈지크에서 라자르-레비라자르-레비 (Lazare-Lévy, 1882–1964)본명 마리-뤼시앵 레비. 파리 음악원 피아노 교수로, 루이-조제프 디에메르의 제자였다. 디에메르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하프시코드로 라모를 연주한 부흥 운동의 선구자다. 드레퓌스는 라자르-레비를 통해 그 계보와 간접적으로 연결된다.에게 피아노를 사사했고, 알렉시 롤랑-마뉴엘과 올리비에 메시앙의 강의도 들었다.
하프시코드를 처음 만난 것은 1949년, 파리 음악원에서였다. 오르가니스트이자 음악학자 노르베르 뒤푸르크노르베르 뒤푸르크 (Norbert Dufourcq, 1904–1990)파리 음악원 음악사 교수이자 오르가니스트. 프랑스 바흐 연구와 하프시코드 음악 부흥에 기여한 음악학자. 드레퓌스는 그의 강의에서 처음으로 하프시코드를 접했다.의 음악사 강의 — 바흐를 중심으로 한 — 를 수강하던 중이었다. 처음으로 하프시코드 건반에 손을 얹은 순간을 그녀는 훗날 한 단어로 표현했다. “계시 같았습니다.”
이후 자클린 마송자클린 마송 (Jacqueline Masson)1950년대 파리 음악원의 하프시코드 교사. 안-마리 베켄슈타이너, 로랑스 불레 등 당대 프랑스 하프시코드 연주자들을 배출했다.에게 하프시코드를 배우기 시작해 1951년 6월 15일, 바흐의 토카타 올림바단조(BWV 910)로 첫 실기 시험을 통과했다. 같은 시기 앙트완 조프루아-드쇼므앙트완 조프루아-드쇼므 (Antoine Geoffrey-Dechaume, 1905–2000)프랑스의 음악학자이자 하프시코드 연주자. 역사적 연주 관행 연구의 선구자. 드레퓌스는 그에게 3년간 연주 관습론을 배웠다.에게서 3년간 연주 관습론도 공부했다.
1951년 10월, 아버지 페르낭이 파리 자택 근처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스물두 살이었다.
시에나의 여름 — 제를린의 교실
드레퓌스가 처음 시에나를 찾은 것은 1953년 7월이었다. 루제로 제를린루제로 제를린 (Ruggero Gerlin, 1899–1983)베네치아 태생. 밀라노에서 피아노를 배운 뒤 1920년 파리로 건너가 반다 란도프스카에게 사사했다. 1940년까지 란도프스카의 조수로 유럽을 순회했고, 1941년 이탈리아로 귀국 후 나폴리 음악원에서 가르쳤다. 1947년부터 키지아나 아카데미 하프시코드 마스터클래스를 맡았다. 주요 제자로 케네스 길버트, 블랑딘 베를레, 드레퓌스.에게 배우기 위해서였다. 제를린은 1920년부터 반다 란도프스카의 직계 제자이자 조수였다. 드레퓌스는 장학금을 받아 7~8년 연속으로 여름마다 이 키지아나 아카데미키지아나 아카데미 (Accademia Musicale Chigiana)1932년 시에나의 키지 궁전에서 설립된 여름 마스터클래스 기관. 드레퓌스는 이곳에서 일곱 번의 협연 무대에도 올랐다.를 찾았다.
그녀는 훗날 제를린을 “나의 유일한 하프시코드 선생”이라고 불렀다. 케네스 길버트, 실비 스피케, 안-마리 베켄슈타이너와 함께 그 교실을 공유했다. 제를린의 가르침은 기교보다 프레이징에 집중했다.
“선생님은 손가락 번호가 해석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 음악 문장에 맞게 선택해야 한다는 뜻이었죠. 두 마디를 위해 몇 시간을 쓰기도 했어요, 오로지 음색의 질을 위해서.”
란도프스카반다 란도프스카 (Wanda Landowska, 1879–1959)20세기 하프시코드 부흥의 상징. 플레옐의 현대적 철제 프레임 하프시코드로 바흐와 쿠프랭을 전 세계에 알렸다. 드레퓌스 세대는 란도프스카의 낭만적 해석을 넘어서면서도 그 계보 위에 서 있었다.에서 제를린으로, 제를린에서 드레퓌스로. 이 계보는 20세기 프랑스 하프시코드 해석의 한 줄기다.
두 대의 악기
1957년 말, 오빠 피에르가 파리의 한 골동품 상점에서 하프시코드 한 대를 구해왔다. 18세기 프랑스 악기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이었다. 레이먼드 러셀레이먼드 러셀 (Raymond Russell, 1922–1964)영국의 건반악기 수집가이자 학자. 에든버러 대학에 소장품을 기증했으며, 저서 『The Harpsichord and Clavichord』(1959)는 당시 역사적 건반악기 연구의 표준 참고서였다.의 컬렉션에서 나온 것으로, 니콜라 블랑셰니콜라 블랑셰 (Nicolas Blanchet, c. 1700–1730년대 활동)파리에서 활동한 18세기 초 프랑스 하프시코드 제작자. 그의 악기들은 파리 음악박물관 등에 보존되어 역사적 복원의 기준점이 된다.가 1715년경 제작한 더블 매뉴얼 악기로 알려져 있었다.
드레퓌스는 이 악기에서 프랑스 역사적 하프시코드의 음색 언어를 직접 익혔다. “이 악기가 고음악 해석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루세와 보몽을 비롯한 제자들도 이 악기 앞에서 배웠다.
파리 음악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악기가 진품 블랑셰가 아닐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하지만 아무도 드레퓌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녀 사후 Musée de la Musique가 이 악기를 인수해 분석한 결과,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누군가가 재건한 악기임이 공식 확인됐다. 마르셀 아스망의 표식이 내부에서 발견되었고, 나무는 18세기산이었지만 울림판·측판 장식·장미 문양 어느 것도 원본이 아니었다. 블랑셰 공방과는 무관한 악기였다. 박물관은 이 악기를 드레퓌스의 이름을 붙여 완전히 복원했고, 지금은 연주회·녹음·마스터클래스에 사용되고 있다.
진짜 동반자는 1963년에 나타났다. 하프시코드 제작·복원 장인 클로드 메르시에-이테리에클로드 메르시에-이테리에 (Claude Mercier-Ythier)파리 「La Corde Pincée」 공방의 장인. 1754년산 앙리 엠슈 하프시코드 소유자. 드레퓌스의 연주회와 녹음을 위해 악기를 조율·정비했다. 1988년 파리 생피에르 교회에서 녹음된 골트베르크 변주곡도 그가 조율을 맡았으며, 두 사람의 협업은 45년 이상 이어졌다.가 소장한 1754년산 앙리 엠슈앙리 엠슈 (Henri Hemsch, 1700–1769)플랑드르 출신으로 파리에서 활동한 하프시코드 제작자. 쿠프랭·라모 시대 프랑스 하프시코드 제작의 정점. 그의 악기들은 정교한 음색으로 “롤스로이스”에 비유될 만큼 평가된다. 하프시코드였다. 이후 드레퓌스는 50년 넘도록 이 악기와 함께 연주하고 가르치고 녹음했다. 1988년 파리 생피에르 교회에서 녹음한 바흐 「골트베르크 변주곡」(Denon CO-3677)도 이 악기로 연주됐다.
제네바, 1958 — 은메달과 바르토크
1958년 9월, 드레퓌스는 제14회 제네바 국제 음악 콩쿠르 하프시코드 부문에 참가했다. 일곱 명이 경쟁에 나섰고, 심사위원 중에는 랄프 커크패트릭랄프 커크패트릭 (Ralph Kirkpatrick, 1911–1984)미국의 하프시코드 연주자이자 음악학자.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연구의 권위자. 1958년 제네바 콩쿠르 심사를 맡아 드레퓌스를 직접 심사했다.과 루제로 제를린, 에타 하리히-슈나이더가 있었다.
2차 라운드에서 그녀는 바흐·스카를라티·라모의 필수 곡목을 마친 뒤 바르토크 「미크로코스모스」에서 세 곡을 하프시코드로 연주했다. 바르토크가 이 작품의 일부를 하프시코드를 위해 의도했다는 것을 스스로 발굴한 레퍼토리였다. 그해 하프시코드 부문에서는 1위 없이 2위만 수여됐다. 드레퓌스는 은메달을 받았다. 현지 신문들은 그녀를 “하프시코드 연주자 중 가장 섬세하고 힘 있는” 연주자로 묘사했다.
콩쿠르를 지켜본 발루아 레이블의 창설자 미셸 베른스탱미셸 베른스탱 (Michel Bernstein)발루아(Valois) 레이블의 창설자. 1948년 파리 설립. 전후 프랑스 고음악 부흥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한 레이블. 제네바 콩쿠르에서 드레퓌스를 보고 “완전히 매료됐다”고 말하며 녹음 계약을 제안했다.은 “완전히 매료됐다”고 했다. 1959년 10월, 드레퓌스는 발루아와 계약을 맺었다.
1889년 이후 처음 — 라모의 귀환
1960년 4월, 드레퓌스는 코펜하겐에서 첫 녹음을 시작했다. 라모 하프시코드 독주곡 전집이었다. 세 장의 LP(Valois MB 418, 419, 420)로 1963년에 완결된 이 음반은 74년의 공백을 채웠다.
라모의 이 작품들이 마지막으로 공개 연주된 것은 1889년이었다.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피아노 교수 루이-조제프 디에메르루이-조제프 디에메르 (Louis Diémer, 1843–1919)파리 음악원 피아노 교수.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1769년산 파스칼 타스캥 하프시코드를 빌려 라모와 쿠프랭을 연주, 하프시코드 부흥의 도화선이 됐다. 그의 제자가 라자르-레비이고, 라자르-레비의 제자가 드레퓌스다.가 역사적 하프시코드로 라모와 쿠프랭을 연주했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계보가 흥미롭다. 드레퓌스의 피아노 스승 라자르-레비가 바로 디에메르의 제자였다. 1889년에 뿌려진 씨앗이 라자르-레비를 거쳐 드레퓌스에게 닿은 셈이다. 1963년에는 라모 실내악 편성의 「클라브생 합주곡집」(Valois MB 468)도 발매돼 아카데미 뒤 디스크 프랑세 그랑프리와 디스코필 그랑프리를 동시에 받았다.
교육자의 시대
1967년, 드레퓌스는 파리 스콜라 칸토룸스콜라 칸토룸 드 파리 (Schola Cantorum de Paris)1894년 설립된 파리의 독립 음악원. 그레고리안 성가와 고음악 교육에 강점을 가졌다. 드레퓌스가 1967년부터 1990년까지 23년간 하프시코드를 가르쳤다.의 하프시코드 교수직을 맡았다. 이후 가르침은 한 기관에 머물지 않았다. 보비니 국립음악원(1971–1982), 소르본 음악학 연구소(1971–1982), 리옹 국립 고등음악원(1982–1993), 뤼에유-말메종 국립 고등음악원(1982–1994), 빌크루아 음악 아카데미(1983–2008, 17회), 생막시맹 국제 고음악 아카데미가 차례로 이어졌다. 1994년 이후에는 케 도르세 자택에서 개인 수업을 이어갔다.
뤼에유-말메종의 금요일 그룹 수업에는 커피와 수제 케이크가 빠지지 않았다. 학생들은 서로의 수업을 함께 들었다. 빌크루아와 생막시맹의 여름 아카데미에는 1754년산 엠슈 악기를 직접 가져가 가르쳤다. 케 도르세 자택에서는 일요일 오후 차 모임도 열었는데, 전 세계에서 온 전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제자들 — 루세, 보몽, 비니쿠르
드레퓌스는 1988년 라디오 인터뷰에서 가르침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교육은 내 직업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술가의 성장에도 중요한데, 자신의 확신 안에서 정체되지 않도록 막아주니까요.”
제자들이 “드레퓌스의 잠언(Proverbes Dreyfusiens)“으로 기억하는 말들이 있다.
“음표는 음악이 아닙니다. 음악은 그 사이에 있습니다.”
“연주를 들으며 청중이 악보를 눈앞에 펼쳐둔 것처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호흡이 없으면 음악은 죽습니다. 호흡한다는 것은 느리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느리게 한다고 호흡하는 것도 아닙니다.”
“연주할 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프시코드 음악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예술을 폭넓게 알아야 합니다.”
제자 조리 비니쿠르조리 비니쿠르 (Jory Vinikour)미국 출신 하프시코드 연주자. 1990년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파리에 와 드레퓌스에게 1994년까지 사사했다. 드레퓌스 사후 슬립트 디스크(Slipped Disc)에 추모문을 기고했다.는 이렇게 회상했다.
“위게트의 가장 큰 장점은 거의 초자연적인 수준의 통찰력이었습니다. 어떤 두 연주자도 같지 않기에, 그녀는 각 학생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도록 이끄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론이 악기 숙달을 대신하는 일을 그녀는 절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프레이징, 표현력, 명료한 폴리포니 처리 — 그것이 그녀가 강조한 것들이었습니다.”
크리스토프 루세는 스콜라 칸토룸에서 드레퓌스에게 배웠다. 학교 일정 탓에 주중에는 올 수 없어 매주 토요일 그녀의 자택에서 개인 수업을 받았다. 이후 헤이그 왕립음악원에서 밥 판 아스페렌에게 배우고, 1983년 브뤼헤 하프시코드 콩쿠르에서 22세에 1위를 차지했다. 1991년 레 탈랑 리리크를 창단했다.
올리비에 보몽은 뤼에유-말메종에서 드레퓌스에게 배웠다. 공부하는 동안 구스타프 레온하르트구스타프 레온하르트 (Gustav Leonhardt, 1928–2012)네덜란드의 하프시코드 연주자이자 지휘자. 역사적 연주 관행 운동의 핵심 인물. 보몽은 드레퓌스에게 배우면서 레온하르트의 쾰른 해석 강좌도 참관했다.의 쾰른 해석 강좌도 참관했다. 이후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CNSMDP)의 하프시코드 교수로 드레퓌스의 뒤를 이었다.
엘리자베트 조이에는 17세에 드레퓌스의 바흐 연주를 듣고 그날 밤 하프시코드 연주자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이름이 확인된 제자만 스무 명이 넘고, 아르헨티나·브라질·일본·미국에서 온 학생들이 섞여 있다.
117장의 음반
1956년부터 2008년까지 117개의 음반을 냈다. 그중 36개가 바흐 작품이었다. 발루아, 에라토, 하르모니아 문디, 아르히프 프로덕션, 데논(닛폰 콜럼비아), 도이체 그라모폰, 필립스 — 당대의 주요 레이블 대부분을 거쳤다.
주요 음반들만 추리면: 라모 하프시코드 독주 전집(Valois, 1963), 쿠프랭 『Pièces de clavecin』 전 4권(Valois, 1962–1970, 아카데미 샤를 크로 그랑프리 1962), 비버 『묵주 소나타』(Archiv, 1968), 바르토크 『미크로코스모스』 Vol. 3–6(Harmonia Mundi, 1970, 아카데미 샤를 크로 그랑프리 1970), 하이든 트리오 전집(Valois, 1971, 아카데미 샤를 크로 그랑프리 1972), 바흐 프랑스·영국 모음곡(Archiv, 1973–74), 바흐 「골트베르크 변주곡」(Denon CO-3677, 1988), 바흐 『Das Wohltemperierte Klavier』 전 2권(Denon, 1993·1997), 뒤티외 『인용들』 세계 초연 녹음(Erato, 1994).
아카데미 샤를 크로 그랑프리를 7회, 아카데미 뒤 디스크 프랑세 그랑프리를 3회 받았다. 라디오 출연은 194회,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30편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64년 『Gramophone』에 쿠프랭 음반 서평을 쓴 라이오넬 솔터는 이렇게 적었다. “그녀의 레지스트레이션은 절묘하게 변화하면서도 절제되어 있어, 발이 분주한 하프시코드 연주자들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프랑스의 한 평론가는 단호했다. “우리 동료 대부분은 — 우리도 동의하지만 — 위게트 드레퓌스를 반다 란도프스카 이후 우리 시대의 최고 하프시코드 연주자로 꼽는다. 그녀는 무엇보다 예술가다. 즐기면서 연주하는 음악가.”
현대 음악과의 만남
드레퓌스는 바로크 전문가였지만 현대 음악과의 접점도 남겼다. 1958년 제네바에서 바르토크를 하프시코드로 연주한 것, 1973년 귄터 비알라스의 하프시코드 협주곡을 초연한 것이 그 예다.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인연은 앙리 뒤티외앙리 뒤티외 (Henri Dutilleux, 1916–2013)20세기 후반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 한 명. 드레퓌스를 위해 실내악 작품 『인용들(Les Citations)』의 확장 버전을 완성했다. 오보에·하프시코드·더블베이스·타악기 편성의 이 작품은 현대 하프시코드 레퍼토리의 정수 중 하나다.였다. 뒤티외는 드레퓌스를 위해 자신의 실내악 작품 『인용들(Les Citations)』을 새로이 확장했다. 초연은 1991년 브장송 페스티벌이었고, 녹음은 1994년 에라토에서 나왔다. 20세기 최고 작곡가 중 한 명이 하프시코드 연주자를 위해 곡을 쓴 사례는 드물다.
케 도르세의 마지막
드레퓌스의 마지막 연주회는 2008년 11월 27일 빈에서였다. 50년 넘게 파트너였던 에두아르트 멜쿠스가 그녀의 80세 생일(11월 30일)을 기념해 마련한 자리였다.
2016년 5월 16일 자정 무렵, 파리 케 도르세 91번지 아파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1949년부터 살았던 집이었다. 오르세 미술관과 에펠탑이 보이는 창가에서 어린 연주자들에게 바흐를 가르치며 보낸 마지막 세월이었다. 낙상으로 6개월을 입원한 적이 있었고, 또 다른 사고가 결정적이었다.
이튿날 프랑스 뮈지크는 그녀를 “고음악 르네상스의 핵심 인물”이라고 불렀다.
정부 훈장도 이어졌다. 1973년 국가공로훈장 오피시에, 1995년 레종 도뇌르 슈발리에, 2008년 레종 도뇌르 오피시에. 같은 해 5월에는 고향 뮐루즈가 메달을 수여했다. 2018년 6월, 뮐루즈에 새로 지어진 음악원에 그녀의 이름이 붙었다 — Conservatoire de Mulhouse Huguette Dreyfus.
하프시코드들은 파리 음악박물관(Musée de la Musique)으로, 아카이브는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으로 갔다. 2018년 5월, 전 제자들이 모여 추모 연주회를 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날아온 제자도 있었다.
계보의 문제
고음악의 역사를 쓸 때 우리는 종종 ‘위대한 연주자들’의 목록을 만든다. 란도프스카, 레온하르트, 루세. 하지만 그 목록에서 빠지는 이름들이 있다. 전달자들, 이어주는 사람들.
드레퓌스는 란도프스카에서 루세·보몽으로 이어지는 계보의 중간 고리다. 하지만 단순한 연결자가 아니다. 1889년 디에메르가 라모를 하프시코드로 연주했을 때 뿌려진 씨앗이 라자르-레비를 거쳐 드레퓌스에게 닿았고, 그녀는 그것을 음반과 가르침으로 세상에 퍼뜨렸다. 란도프스카의 낭만적 플레옐 하프시코드를 넘어, 블랑셰이든 아니든 그녀가 손끝으로 익힌 18세기 악기의 감각은 다음 세대로 전해졌다.
올리비에 보몽이 자크 뒤플리의 하프시코드를 연주할 때, 그 안에는 전쟁을 피해 알프스를 혼자 넘던 열다섯 살 소녀의 손끝도 어딘가에 녹아 있을 것이다.